Info

Artworks, Thought and Life

나는 저자성(著者性 authorship)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달콤한 회사생활을 접었다. 산업사회에서 공동의 실용적인 목적을 위하여 힘을 모으고 그 댓가를 받는 것이 더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지만, 태생적으로 저자성에 강한 매력을 느껴왔다. 그 시작은 크레파스로 그리는 낙서로부터였을 것이다.

개인 최초의 저자성
한 개인의 삶에서 최초의 저자성은 언제 시작될까? 크레파스로 자신의 스케치북이나 벽에 그린 낙서가 최초로 저자가 되는 기회였을 것이다. 스케치북에 그려진 그림의 저자성은 그의 부모가 그것을 지켜보거나, 퇴근해서 그의 스케치북을 열어보면서 비로서 발현된다. 최초의 그림은 그것이 조형적으로 좋았건 나빴건 아이가 손근육을 사용했다는 것만으로도 칭찬을 받았겠지! 그렇게 저자라는 것은 창작자와 관람자의 사회적 관계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동네 담벽락에 그린, 더 많은 관객에게 보여진 낙서는 어땠을까? 그것은 집에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을때와는 다른 사회적 책임을 수반한다. 일반적인 담벼락의 주인이라면 그 그림을 싫어 했을 것이고, 심지어 물걸레로 그것을 지우도록 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저자성은 일종의 제작과 피드백을 통해 상처와 함께 성장한다.

저자가 되고 싶은 마음
어떤 일이건 그것의 동인(動因 trigger)이 있어야 하는데, 저자가 되기 위해서는 창조적이고 부지런한 천성에 더해 적절한 결핍이 필요하다. 소비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삶과 먹고사는 것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한 삶은 창작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적당한 허기(虛饑)가 필요하단 얘긴데 물론 박수근은 고단한 삶 속에서 담배껍질에 그림을 그리며 화가의 삶을 이어갔고, 모 시나리오작가는 홀로 골방에서 글을 쓰다 굶어 죽었으니, 먹고사는 삶의 무게를 언급하는 것은 핑계일수도 있겠다.

저자성있는 삶의 매력
나는 23살 무렵 ‘호로박사와 간호사 야메’, ‘파인애플V’라는 (이제는 이미지검색을 통해서도 접할 수 없는) 만화작품을 발표하면서 저자성의 삶을 경험했다. 저자성이란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는 일이다. 음악이던 미술이던 자연의 상태와 다른 변형을 제공하고 그것의 제작자로서 관람객에게 사랑을 받고 기억되는 것이다. 홈페이지(구.하피넷 hafy.org)는 13년 넘게 이어오고 있는데, 온라인에서 내 작품을 보고 찾아온 많은 친구들을 사겼다. 그리고 십년이 흐른 어느날 다시 온라인(facebook)에서 그 당시의 하피어를 만났다.(hafyer: 나의 홈페이지에 들러서 함께 말을 나누던 사람들을 나는 그렇게 불렀다.) 그 당시에 내가 그렸던 작품과 그 당시에 함께 나눴던 화제들에 대해 다시 이야기나눌 때 느꼈던 짜릿함은 같은 시기에 놀았던 옛친구들과는 또 다른 기쁨으로 다가왔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들을 작품으로 만들고, 그것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 나눈다면 그런 소중한 ‘또 다른 친구들’을 만드는 셈이다.

이미지 선점하기
저자는 자연에 가공을 하고 그 가공된 것을 선점한다. 풍경화는 윌리엄터너에게, 하나의 색깔로 면을 채운 이미지는 마크 로스코와 바넷 뉴먼에 의해 선점당했다. 하얗고 통통한 장갑과 흰색 땡땡이 무늬의 빨간 원피스를 보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월트디즈니가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라는 캐릭터로 그 이미지를 선점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그것과 유사한 것을 만들어내면 욕을 먹고 사람들의 기억 속엔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나마 이미지는 나은 편. 오선지에 묶인 음역의 좌표와 문학의 스토리는 벌써 그 한계가 드러내고, 선점당한 음의 변주나 스토리의 반복을 흔히 접할 수 있다. 이젠 아무리 스토리를 멋지게 짜내도 세익스피어의 영예에 다다를 수 없는 것이 한계다. 이제 더 이상 선대 작가의 작품은 썪지 않고 복제되며, 누구나 저자가 될 수 있는 디지털시대가 열렸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당대의 그 동네 화가들과 싸워 이기면 그 뿐이었지만, 지금의 화가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모든 화가들과 인상주의화가들과 그리고 앤디워홀을 필두로한 근대의 화가들과도 싸워야 한다. 동시대의 화가들과 싸워야 함은 물론이다. 5000년대 쯤되면 얼마나 많은 이미지가 널려있겠는가? 2000년대에 살고 있는 것에 감사할 정도다.

나의 저자성의 특징
그래서 내가 선점하려하는 나의 이미지는 눈이 뻥뚫린, 왠지 귀여운 모양의 캐릭터이고, 다양한 머리모양을 갖고 있다. 이것은 다위니즘의 이해를 바탕으로 삶에 대해 관조하는 태도를 갖는다. 다양한 머리 장식을 보고 사람들은 유전자 다양성과 서로의 개성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다시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나의 태도를 하나의 기호로서 긍정하는 관객을 만나는 것이 나의 저자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독특한 선을 기억하고, 색깔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시각적으로는 나의 그림을 보며 키쓰헤어링과 요코야마 유우이치에 대해서도 연관지을 수도 있겠다.

저자, 박진영
박진영은 꽤나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다. 자신이 작곡한 노래에 ‘제이와이피’라는 속삭임을 넣어 자신의 제품임을 표현하는, 국내에서는 보기드문 오디오사인(audio signature)을 꾸준히 넣고 있다. 매번 표절논란에 휩싸이지만, 저자성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그런 그는 90년대초 ‘섹스는 게임이다’라는 식의 파격적인 주장을 했고, 남자로서는 드물게 섹시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언제나 단호한 어조였다. 근데 최근 그는 종교적인 공부를 하고 3년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다 지워버리고 싶다고 발언했다.(2013년 9월4일, MBC 라디오스타 방송에서) 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실망스러운 일인가? 지금 그가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을까? 지금 그가 하는 말을 다시 3년 후에 전면적으로 부정할지도 모르는데. 그의 저작의 다른면이 더 강한 매력으로 다가온다면, 그의 생각의 변화까지도 청자들이 즐기며 따라가겠지만, 그런 변화에 외면할 청자들도 (나를 포함하여) 많을 것이다.

일관되어야 할 저자의 태도
그렇다. 저자란 사회적 관계 속에 있으므로, 저자가 된다는 것에는 그러한 발언과 행동에 책임이 따른다. 미술대학 4학년 아이들이 졸전에서 교수의 지도에 따라 억지로 자신의 작은 콤플렉스를 이슈화하여 작품을 만들어낸 것을 본다. 이미지와 생각의 홍수인 미술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로 시선을 끌어야 함이 분명한데, 그것은 몇년이고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박진영처럼 몇년만에 접어버릴 말을 한다던지, 1년도 채 이어나갈 힘이 없는 이야기라면 많은 사람들이 채 기억해줄 시간적 여유가 없다. 회사를 그만두고 이렇게 이런 오늘날의 작품을 하기까지 걸린 3년은 그런 시간이었던 듯하다. 그 사이에 책과 강좌를 통해 공부하며 변하지 않을 나의 생각을 다듬었다. 작은 이슈들을 변화시키더라도 큰 테마는 하나의 줄기로 흐를 것이다.

그래서, 변화 속에도 변하지 않는 나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나의 그때 그때의 작품을 기억하는 친구가 되어달라고, 지금 글을 읽는 당신에게 부탁하고 있는 중이다.

Comments

No comments yet.

Leave a Reply